베어진 사랑 _<적의 벚꽃>을 읽고

이혜란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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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왕딩궈는 이 소설은 슬픔을 쓰려는 것이 아니라, “ 피할 수 없는 그 길에서 더 이상 빼앗기고 무너지고 박탈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주인공 ‘나’가 느꼈을 슬픔이 크게 다가왔다. 작가 말대로 과연 ‘나’가 아내, 추쯔의 부재를 딛고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말미에서 추쯔가 돌아오기만을 바랐던 ‘나’가 카페를 정리하고 떠나지만 과연 이 결말을 희망의 여정일까.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사라진 추쯔가 영원히 주인공의 삶을 맴돌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안타까웠던 부분은 주인공이 왜 뤄이밍에게 추쯔에 대한 말을 단 한마디도 못 꺼내고, 그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느냐는 거다.

 

추쯔와 사진을 찍으러 함께 시간을 보냈을 은행간부 뤄이밍. 추쯔의 남편이 멀리 건설일을 하러 떨어져 있는 사이. 추쯔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누군가가 필요했으리라. 추쯔는 자신에게 사진을 가르쳐줬던 뤄이밍과 친해지고, 뤄이밍에게 돈을 빌리게 되고 뤄이밍은 추쯔와의 관계에서 선을 넘을 것이다. 물론 책에서는 정확히 뤄이밍과 추쯔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 주지 않아, 추쯔의 행방을 추측해볼 뿐이다. 뤄이밍과의 관계가 의심스러웠다면 서술자 ‘나’는 한번쯤 추쯔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뤄이밍에게 따져봄직한데, 작가는 ‘나’를 수동적인 인물로 그린다. 한 번 죽을 뻔했던 경험 때문에 더는 뤄이밍에게 저항하지 못했던 걸까.

 

이 소설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대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대만에는 건설붐이 일어났고, 대지진과 사스가 유행하기도 했던 격변의 세월이었다. 어느 비오는 날 서술자가 비를 맞지 않게 공간을 내어줬던 인정이 많았던 추쯔. 그녀에게 처음으로 가족 같은 느낌을 받은 ‘나’는 추쯔가 함께 머물고, 지진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은 추쯔를 옆에서 보살펴 줘야 했다. 하지만 돈을 벌러 ‘나’는 타이페이로 가야만 했다. 돈이 그 둘 사이를 어그러뜨렸다.

 

추쯔가 드나들었던 뤄이밍의 집. 그리고 그의 집에서 추쯔와 함께 사진을 찍었을 벚나무. 뤄이밍은 소금물을 뿌어 벚나무를 썩게 만든 후 베어버린다.

“적은 꿈속에서 파멸시키고 벚꽃은 침대 옆에 흐드러지게 피었네.”

 

추쯔를 상징하는 벚꽃나무를 베어버렸지만 ‘나’는 추쯔를 잊을 수 있을까?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면 추쯔가 생각날 것 같다. 아니 굳이 벚꽃이 아니더라도 ‘나’는 영원히 추쯔를 기다릴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가 추쯔의 행방을 찾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뤄이밍에 맞서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다. 권력 앞에 사랑은 힘을 낼 수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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