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

10기 이은진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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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이 ‘우연의 폭력성’에 대해 감각하게 해주었다면, (정반대로)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은 끈질기게 이어지는 인과관계를 통해 ‘운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감각하게 해준 것 같다. 


결국 ‘나’의 생에서 맞이하는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실은 이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것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개인을 넘어 핏줄을, 공동체를, 시대를 바라봐야 지금 ‘내’가 처한 부조리함이나 고통이 이해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은. 그렇게 조망해야, 복수가 아닌 수용과 용서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소설의 제1 화자인 알바는 쿠데타 정권에서 사람들의 망명을 돕는 일을 하다가 결국 군사 정권에 납치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녀가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할 수 있던 동기에는 반독재 운동을 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운명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어머니 블랑카, 어머니의 어머니인 클라라, 그 어머니인 니베아로부터 물려받은 도덕 관념, 그리고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마을에서도 평등과 자유를 갈망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저항심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억압에 굴하지 않는 성정과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열정을 지닌 채 태어났다. 그녀는 또한 운명처럼, 외할아버지인 에스테반 트루에바로부터 비롯된 증오와 혐오, 폭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세상을 맞이하며 견디기 힘든 고통에 처한다. 


놀라운 것은 알바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나아간다는 점이다. 고문 중에 당한 강간으로 인해 생긴 지도 모를 아이를 몸에 품고, 외할아버지의 과오 때문에 더 치욕스러운 고통을 맞이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외할아버지와 함께 과거를 돌아보는 일(소설 쓰기)을 시작한 것. 나는 감히 상상도 못할 마음이다. 누군가 조금만 내 자존심을 건드려도 복수심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이런 마음에 경외심이 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울었다.) 


소설의 또 다른 화자인 에스테반 트루에반은 실제 삶에서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그의 독선과 폭력성, 극우적인 마인드, 권력에의 욕망, 오로지 클라라에게만 향하는 편협한 사랑 등 미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의 입장에서 그의 목소리로 삶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런 사람’의 정신세계가 이해되었다. 아, 그의 입장에서는 그게 옳은 선택이었구나, 그의 상황에서는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그러다가 소설의 막바지에는 그의 처지에 연민의 마음마저 들었다. 저렇게 모든 권력-힘을 빼앗긴 채 자신의 마지막 사랑인 손녀마저 자신의 업보로 인해 상처받는 처지가 되는구나. 작가가 그를 화자로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평생 에스테반 트루에반 같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영혼은 사회악이며 구제될 수 없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는 용서와 수용은 커녕 나와 다른 사람을 마주 볼 마음의 자리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화자가 알바만이었다면, 알바의 용서와 수용의 마음도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돌아보아야) 복수가 아닌 용서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사벨 아옌데의 자전적인 삶에서 비롯된 마법 같은 스토리텔링으로 여러 감정이 정화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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