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연결고리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을 읽고)

이혜란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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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혼의 집>은 내가 최근 1, 2년간 읽은 소설 중 단연 최고였다.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온전히 읽은 충만함이 느껴지는 소설. 칠레의 193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의 현대사 속 진통은 우리 역사와 닮아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군부 독재와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저항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도왔던 이름 모를 민중들의 이야기가 오버랩 되었다.

 

용서의 얼굴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보수당과 사회당의 두 면모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권력과 보수의 상징인 에스테반 트루에바를 둘러싼 클라라, 블랑카 알바, 그리고 페드로 테르세르와 하이메와 미겔의 인물 구도. 만약 트루에바의 반대편에 섰던 저항하는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소설의 끝부분에서 이르러 독자는 어쩌면 트루에바와 가르시아대령을 향한 분노와 무기력함을 가질 수 있을지도 있으리라.  작가는 이런 복수심에서 한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젠가는 가르시아 대령을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당연히 복수 받아 마땅한 사람들 모두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증오심마저 사라졌다.”(326쪽)


강간하고 고문을 했던 원수 가르시아를 용서하고 ‘외할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알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알바에게까지 내려온 ‘업보’에 있었다. 외할버지가 판차 가르시아와 뭇 여성들에게 가했던 성폭행이 업이 되어 내려와, 그녀가 가르시아 대령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알바는 외할아버지의 죄를 책임지고 자신이 상처입고 원한을 사게 한 영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더는 이런 업보가 이어지지 않게 자신에게서 끝내려는 의미였다. 그리고 알바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뱃속의 아이를 기다린다. 칠레의 미래를 위해 복수와 원한은 자기에게서 마침표를 찍길 바라는  알바의 모습에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나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인류애적인 사랑이 가능할까, 작가가 그리는 사랑은 포용의 크기가 컸다.

 

계층사이의 사랑과 여성들의 투쟁

소설 속에 인물들은 계층을 넘어선 사랑을 한다. 사회 운동을 하는 페드로 테르세르와 미겔과 사랑에 빠지는 모녀. 트루에바의 반대와 공포 정치의 상황에서 페드로와 미겔은 도망 다니지만 그들의 마음은 늘 서로에게 향해 있다. 트루에바의 눈을 피해 가난한 민중을 돕고 있는 블랑카와 알바 역시 페드로와 미겔와는 마찬가지로 이웃을 돌보고 협력하는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다.

 

작가는 소설 속 여성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인물로 그렸다. 감옥에서 고문과 강간을 당했던 아나 디아스는 알바에게 끝까지 버티기 위해 글을 써보라는 힘을 주었고, 창녀인 소토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찾으며 트루에바에게 과감한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한 자본가에게서 벗어나 다른 자본가 밑으로 들어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협동조합을 구성해서 마담을 쫓아내야 해요...주인 나리도 조심하셔야 할 걸요. 나리 소작인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하면 나리도 끝장이에요.”(210쪽)  에스테반 트루에바에게 당당히 말하는 소토. 그리고 알바를 구할 수 있는 키를 소토가 가지고 있기에 트루에바가 그녀에게 부탁하는 부분은 계층을 넘어선 우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마술을 부리는 영적 존재

클라라의 죽음 이후, ‘길모퉁이 큰 집’에는 영혼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잔인한 얼굴을 한 쿠데타가 일어난다. 집안을 떠돌던 영혼은 신성하고 집안의 뿌리를 지탱하는 수호신이었다. 지진과 죽음을 예언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 영혼은 칠레의 역사를 간직한 혼령들이다. 한이 맺힌 혼들이 떠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에 곳곳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장치는 소설을 읽는 맛을 더해 주었다. 클라라는 예측하는 지진과 죽음을 예측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미리 막아낼 방법이 없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인간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클라라가 남긴 노트는 알바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알바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함께 지난일을 회상하며 집안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아직 문명화되지 않는 칠레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통과 고유함, 그리고 칠레의 현대사까지 4대에 걸친 이야기를 말이다. 마술적인 힘을 빌려 재미있고 격정적이고 생생하게 읽혔던 <영혼의 집>. 역사적 사실만 나열했다면 딱딱하게 느껴졌을 텐데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소설이. 소설의 묘미를 제대로 느꼈다. 공포 정치에서 권력을 쥐고 복수를 하려는 자, 살아남으려는 자와 그리고 돕는 자. 결국 에스테반은 사랑하는 손녀딸을 위해 미겔과 만나기까지. 진정한 화합이 이뤄낸 사랑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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