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서다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읽고)

박영란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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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을 쓴 저자 강상중은 재일 한국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막스 베버와 나스메 소세키의 글을 예로 들어 그들의 생각과 비교해가며 자신이 성찰한 바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3장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나쓰메 소세키가 쓴 <배를 타고 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는 자신이 큰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죽기로 결심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그러나 남자는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발이 갑판에서 떨어지는 순간 ‘끝없는 후회와 공포를 느끼며 검은 파도 속으로 조용히 떨어져’ 간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저자는 그 남자의 행위를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시대의 흐름에 휘말리는 것이 싫다고 해서 구시대에 매달리는 것은 더 바보 같은 짓’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남자가 바다에 뛰어든 게 구시대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말이 목에 걸렸다. 왜냐하면 그 남자가 타고 가는 큰 배를 자본주의로 볼 때, 배를 타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을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타인으로 상정해본다면, 인간의 깊은 소외가 그 남자를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회의를 품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다’라고 <꿈 분석>에서 말했다. 나이 든 사람이 존재의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융의 ‘회의’는 이 책 저자의 ‘고민하는 힘’이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가고 있고, 왜 가는지 그 의미를 잘 모르면서 살아간다. ‘사는 것’ 자체가 부분적인 지식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를 많은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 우리는 모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한밤의 여행객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서로 손을 잡고 어둠을 헤쳐 나가야 하는 이유일지도.

나쓰메 소세키가 배에서 떨어지는 남자의 후회와 공포를 말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난 받아들였다. 전라남도 최서남단에 가거도라는 섬이 있다. 목포에서 하루 1회 또는2회밖에 운행을 안한다. 가거도 바닷가 바위에 서면 물이 얼마나 새파란지 출렁이는 파도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그 바다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갑판 위에서 나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 넘실거리는 물에 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겠구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을 던지는 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자기를 함부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재일교포 2세로서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도 아닌 자신을 ‘경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끊임없이 매달렸던 것 같다. 그러나 정체성이란 지역이라는 공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의 경계성을 놓고 따진다면 우린 모두 경계인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그리고 오늘과 내일이 달라질 한순간의 경계에 모두가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느낀 감상은 ‘무채색’이었다. 선명한 색상이 떠오르지 않고, 거르고 걸러낸 생각을 다듬어서 발랄함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흥미로웠던 부분은 저자가 하고 싶은 일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롱테이크로 넓은 만주 들판을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첫 장면에 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눈에 보이는 듯하는 그 장면의 남자가 작가 자신이라는 말에서 책 전체에 흐르는 쓸쓸함이 이해되었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해서, 또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건너가고 있음’ 그 자체에 있는 것을. 책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순간을 살고 있다고 느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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