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영
2024-06-05
조회수 67

당신에게 꽤 중요한 영향을 미쳤거나 당신을 변하게 했지만, 굳이 언급할 만큼 중요하거나 심각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경험이나 사건이 있나요?


별것 아니라고 말하기는 싫다. 오만 생각이 다 드는 이벤트가 내게 있었고 나를 제외한 당사자는 모두 잊었다. 상처 비슷한 게 나에게만 남아 삶을 괴롭힌다. 


경상북도 안동이 고향인 절대 가부장제 원가족 서열 1위 친정 아버지가 퇴직을 했다. 삶의 단계들 중 퇴직이라는 예고된 인생의 전환이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살다 보면 예정된 내리막이라지만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을 듯하다. 내 삶은 완전한 정점을 찍지 않았고 미세하게나마 오르막을 오르고 있으니 그 마음을 공감할 수 없었다. 


예민하고 불안이 많았지만 가족을 끔찍이 챙기고 아꼈던 사람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고관절 탈구로 다리를 절어야 할 운명이었다. 막 돌 지난 내가 50% 불안한 완치 확률로 치료를 시작했을 때 '너의 다리를 목숨 걸고 고쳐주겠다.'는 다짐하며 썼던 눈물 젖은 편지가 아직 내 책장에 꽂혀있다. 


퇴직 후 4년간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매일 술을 드시고 엄마를 힘들게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내게 전화해 엄마와 이혼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왜 그런 협박을 내게만 했는지는 모르겠다. 한때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뭐든 열심히, 결국 해내는 모습과 목표를 이루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퇴직이라는 인생의 단계는 아버지에게 좌절을 안겨줬다. 교육장으로 기사님이 운전해 주던 차를 타던 의미 없는 권력을 내려놓고 아버지는 사람들과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악몽 속에 살았다. 그 속에서 가족 모두를 함께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4년 동안 저녁이면 시도 때도 없이 상처받을 게 분명한 전화를 받고 부모에게 인연을 끊자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 못 하는 척한다. 아버지조차도 내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을 14살 사춘기 때 매를 들었던 일로 기억한다. 


상황을 진정시키는 일도 내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아직도 8시 넘어서 울리는 아버지 전화는 받지 않는다. 어디에 말할 수도 없었다. 엄마조차도 지나간 일, 본마음은 아닌 일로 넘겼다. 말하려고 할 때마다 덮어버렸다. 이제는 기억이 안 나신단다. 모두에게 아무 일도 아닌데 나에게는 인생 뿌리의 믿음이 걸린 문제였다. 혼자 어찌할 수 없어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집안 망신을 시켰다며 비난 받았다. 


나의 원가족은 가족 운명 공동체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정상이었다. 그곳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래봤자 인정되지 않았다. 아직도 혼자 떨어져 나오려 발버둥 치고 있다. 


이게 내 스몰 트라우마다. 스몰 하지 않다. 하지만 스몰 트라우마가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한다. 요새는 오히려 내게 부정당할까 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나만 입다물면 아무도 모를 이야기, 나만 넘어가면 세상이 평온할 이야기다. 


성인이 되어 생긴 부모에 대한 배신감이 내 글 여기저기에 묻어난다. 그 근저에 이런 내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번 글조차도 자기 검열로 다소 생략, 축소되었다. 자, 이제 인식이 끝났다. 그리고 수용과 행동이 남았다. 책, 나는 사실 좀 별로였다. 검사 기술력만 향상되어 고칠 수도 없는 질병을 진단하는 현재의 의료 시스템 같았다. 잘 지내고 있던 내 마음이 이렇게 다 들춰져 힘들어졌는데 말이 좋아 수용과 행동이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서서히 고쳐가는 게 어떻겠냐고.. 


아버지는 70이 넘었고 건강도 좋지 못하다. 자식에게 외면 당할까 봐, 그걸 가장 두려워하는 약자가 되어있다. 고쳐 사랑하게 엔 둘 다에게 있을 가혹한 시간이 두렵고 남은 시간도 많지 않음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떤 상처는 그냥 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식의 수용 또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다른 모습의 항체 생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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