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는 따뜻한 제안” - 고민하는 힘 (강상중)

이여진
2024-05-07
조회수 93

가벼운 에세이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근현대의 근간이 되는 산업혁명의 가치인 “자본주의와 개인의 자유”,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회의적인 관점으로 던져진 저자의 질문에 공감할 수 없어 많이 힘들었던 책이다.

그래서 몇 번을 다시 읽으며 작가의 질문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이 책이 다시 읽히기 시작한 것은 ‘막스 베버’에 대해 간략한 조사를 한 다음이었다.

[ 막스 베버]

  • 문화의 세계는 이른바 가치의 세계 이므로 가치를 떠나서는 어떠한 사회 과학 연구도 진전되지 않는다.
  • 가치란, 자신의 견해나 관점에서 기초한 성격과 자기과의 관계를 벗어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성격이다
  • 가치의 문제를 3가지로 나누어 설명
  • 가치 관련: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실재는 무한하고 문화의 세계는 가치의 영역이므로 가치의 설정 없이는 연구를 시작할 수 없다
  • 가치 판단: 정책과 정치세계의 가치로 정책과 정책 실현은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야 한다
  • 가치 중립: 교수가 강의를 할 때는 개인적인 가치 판단을 배재해야 한다


여러가지 고민 끝에 내 관점에서 질문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 강상중은 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는가?
  • 강상중의 질문을 내가 다시 해석해서 재정리해본다면?
  • 나는 그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 강상중이 던진 본인의 질문에 대한 본인의 답은 무엇인가?


■ “나란 누구인가”는 왜 첫번째 질문인가?

자유와 개인의 가치가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 시대에는 “나의 가치”가 그 어느때 보다도 중요하다. 나의 가치를 기반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타인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란 누구인가”가 저자가 던지는 첫번째 질문인 것은 당연하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내가 어떤 사람들과 연결되어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현대시대의 “나=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의 산물”이므로, 나는 나와 타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

■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는 왜 두번째 질문인가?

저자는 개인의 가치가 사는 시대에 기반한다는 막스베버 이론에 근거하여,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돈”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자본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로테스탄트의 청빈사상에서 시작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일체의 낭비와 사리사욕 없이 열심히 노동을 하고, 그 결과 부를 축적해도 그것을 즐기지 않고 다시 영리에 재투자 한다(과거 귀족의 현시적인 소비와 대비되는 과정이다).  이렇게 재투자된 부는 점점 축적되어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저자는 “돈에 대한 고민”에서 큰 두가지 관점을 간과하였다.

첫번째는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자원을 의미하며,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증대 즉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재투자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인 성장이 “최고의 선”이므로 지속적인 최고의 선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본은 계속 증식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두번째, 청빈사상에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돈/자본”에 윤리 의식을 개입시켰다.

열심히 노동한 대가로 돈이 축적되고 그것이 재투자되어 자본주의의 발전이 된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윤리 의식이 개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부지런함=부유함”, “게으름=가난함”이라는 공식은 이미 무너졌다. 마이클 센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부유함의 상당 부분은 태어난 환경 등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운”이라는 것이 기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이 당연한 것 처럼 만들어 그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회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따라서 강상중이 언급한 “가능한 범위내에서 돈을 벌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사용하고”는 저자도 지적했듯이 너무 평범한 논리이며 이상적인 논리이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도덕적으로 내 인생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에 대해 타인에게 인정받는 중요한 수단이므로, 적정한 선에서 돈과의 타협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일수도 있다.

■ 그렇다면 “제대로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는 왜 세번째 질문이 되었는가?

이것은 첫번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서 언급된 “진지함”을 기반으로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知)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주체가 “생각하는 나”로 전환되면서 무엇이 진정한 “앎 知”인지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종교와 종교 공동체가 중심이던 중세시대에는 “생각하는 나”가 중요하지 않았다. 종교(=신)가 삶의 모든 해답을 알고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 혁명으로 “우리는 모른다”라는 거대 담론이 형성되어,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는 종교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제   “나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주체로 해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유발하라리, 사피엔스)

하지만 저자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지극히 세밀한 부분적 지식을 “정보(Information)”으로 정의하고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앎(知)”인 지성(Intelligence)와 구분하였다. 

인간에게 필요한 “제대로 앎”을 사회와 삶에 대한 통찰을 기반으로 한 통합적인 지식으로 정의했다. 이 세상은 AI의 발달로 인간이 기계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AI기반의 지식과 차별화하며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거대 담론은 철학적/사회학적 아니 인문학적인 통찰을 기반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하지만 통합적 지성 기반의 사고가 쉽지는 않다. 이는 인간에 대한, 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런 깊은 생각을 할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기는 한 것일까?

■ 이제   " 우리는 왜 고민하는 힘을 길러야 하는 걸까?"에 대한 나의 답을 찾아보자

이 책이 단순 에세이가 아니라 철학책처럼 느껴지는 것은 저자는  “생각하면서 살자”라는 것을 인생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고민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선사하는 것에 실패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나”와 “타인”의 관계속에서 협조하고 인정하고, 인정받으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중세시대만 해도 인간의 삶의 의미는 종교와 제도, 관습을 통해 부여되었고 농업을 기반으로 인간은 공동체에 속한 삶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인 요즘 시대는 인간의 자유는 중요시되고 있으나, 개개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는 다른 의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잘 살아가기 위해서 깊이 고민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자고 한다.  그리고 나의 가치 기준이 제대로 정립되어야 타인을 수용하면서 타인과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서로 지탱하면서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나로부터 출발한 충분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처음에는 딱딱한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마치며 저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고민은 개인적인 고민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고민하게 만든 것이라고 다독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잘살기 위해 나 자신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다 읽고 나니,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사유하는 힘”으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국어사전적 의미로, 고민은 괴로워하고 애를 태운다는 부정적인 의미다. 저자가 주장하는 깊은 생각은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통찰이므로, 오히려 ‘사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苦悶)’은 단순히 ‘깊이 생각한다’란 뜻이 아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고민’을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움’으로 정의하고 있다. ‘고심(苦心)’과 비슷한 말인 것이다.

* ‘사유’는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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