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 동전을 줍는 삶 ('달과 6펜스'를 읽고)

조혜영
2024-06-25

6펜스와 같이 둥글고 은빛의 달은 하늘에 떠있다. 

우리가 꿈으로 추구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배고픈 달인가? 

아니면 땅에서 주울지도 모를 100원짜리 동전일까?


살면서 몇번은, 어쩌면 여러번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과는 다른 길을 떠올리게 된다. 떠오른다고 모두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한두번이라도 실행에 옮겼던, 한때는 의욕적으로 꿈꿨던 길을 지금도 가고있는 사람 조차도 많지 않으리라.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잘 살아가다가 꿈을 위해서 다른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때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산다. 우선 그들의 용기와 어느 정도 다른 분야에서 뭔가를 이룬 그들이 겪었을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실패가 대단해 보인다. 보통 그런 무용담들은 성공 후 듣게 된다. 성공 후에 듣는 결과에는 과정이 극단적으로 압축되어 버린다. 스트릭랜드가 수많은 날은 굶주리고 부랑자처럼 살아간 길고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나날들의 설명은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는 한 줄로 압축된다. 결국 그들이 도달한 달빛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걸어갔던 밤길에 달은 환히 빛났다. 달빛을 조명삼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위험을 피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달빛을 따라가기위한 험난함을 개의치 않았다. 그의 세계에는 그림으로 자기 속에 존재하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삶의 기준이 될수 없었다.


보통 우리의 삶에도 기준이라는게 있다. 직장에서는 어느정도 기여해야할지, 얼만큼의 노력을 들일지 여러 기준들의 가치를 저울질한다. 그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뭐가 좋고 나쁘다고 말할수는 없다. 기준에는 꿈만 있는것도 아니다. 가족도 있고 행복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가족까지 저버리는 단호함이 그의 천재성으로 이해받을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그의 기준에 한치도 틀림없는 삶을 산 사람이다. 그리기 위해 이세상에 태어났다고 결론내린 순간 그는 그가 속해있던 세속의 안락을 모두 버렸다. 처자식까지... 그의 기준에 그림만 있었을 뿐이다. 마음까지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도 자신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문둥병 걸려 썩어가는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모든 고통의 감내가 달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따라할 수 없고 그렇게 하고싶지도 않다. 아직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가정의 안락, 자녀와의 소박한 행복, 일신의 편안함 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준과 남들 눈에 비치는 내모습까지 내것 아닌 기준에도 단하나 포기하고 살지 못하다.


세상에 이름을 날릴 위대한 한명이 되거나 적당한 아무개로 살다가는 삶이라면 어떤걸 추구하고 살아야하는걸까? 반드시 꿈을 이루면서 살아야하는걸까라는 안일한 생각이 내 삶 전배에 기본으로 깔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꿈을 포기하고 적당히 살아가는 것일까? 가끔 부러울만큼 성공한 사람, 특히나 여성을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솔로라서, 혹은 애가 없으니 그럴수 있었지...'


고백하자면 내 합리화이고 변명이다. 스트릭랜드처럼 운명외에 모든걸 포기하는 삶을 이야기하려는게 아니다. 우연으로 둘러쌓인 삶에서 우연을 운명으로 만든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노력을 별것 아닌 일로 평가절하하기 위한 내 편협한 마음이다. 그러므로써 나는 더 안락하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핑계삼아 숨어 버린다.


내게도 직업과는 다른 '달'이 있다. 달을 바라보는데는 많은 비난이 쏟아진다. 나는 책을 쓰고 모임을 통해서 가치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꿈이 있다. 이런 바램은 가족에게까지 심적인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배가 불러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부터 취미생활로 적당히 하라는 말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면서 적당히 사는 법을 설득당해왔다. 물론 나는 천재도 아니고 어디에서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랬으니 할말이 없었다. 주변에서 보기에 내 행동은 잠시의 객기로 보였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매우 평범하고 그냥 관심이 있어보일 뿐이다. 그나마 남편의 배려로 꿈과 직업을 병행해 삶을 살고 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나의 달을 향한 마음이 적당한 합리화인지 현실적으로는 이럴수 밖에 없는 것인지...


마흔에 모든 걸 버리고 달빛을 따라간 스트릭랜드와 달리 마흔이 되고 내게 다른 욕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람들과 함께인 나를 본다. 물론 소설이라지만 운명일지 모를 일을 속세의 안락에 한발도 더 다가가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스트릭랜드는 죽어가면서 자기에게 부여된 운명을 완성하고 나머지 인간으로의 삶에 죄의식을 느끼며 인생을 완성했다. 나는 가족들과 적당한 행복을 누리며 살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쓰임은 이게 전부였나를 삶의 마지막에 후회로 남길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내 안의 결기일지, 신앙이 없음인지는 모르겠다.